세아의 방은 이제 작은 전쟁 상황실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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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열려 있었고,
벽에는 조성진의 동선을 표시한 지도가 붙어 있었다.
빨간 핀으로 표시된 장소들.
형광펜으로 강조된 시간대들.
메모지에 적힌 인물 관계도.
며칠 밤낮으로 노트북 화면과 벽에 붙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복수 방식이 무모한 돌진에서 치밀한 침투로 바뀌었을 뿐,
그 목표는 단 하나.
조성진을 직접 처단하는 것.
'법으로 잡을 수 없다면... 내가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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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실패는 그녀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었다.
단순히 힘만으로는 안 된다.
상대의 방패를 꿰뚫을 날카로운 창이 필요했다.
그 창을 정확히 꽂아 넣을 지능이 필요했다.
그녀는 조성진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미행 노트를 다시 펼쳤다.
낡은 노트.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힌 글씨들.
특히 지난번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조폭들의 얼굴을 노트에 그려 넣었다.
스케치는 서툴렀지만, 그들의 특징은 명확했다.
키, 체격, 문신, 말투.
그들의 움직임,
그리고 조성진을 보호하는 방식까지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들은 조성진의 그림자처럼 항상 그를 지키고 있었다.
단순한 보디가드가 아니었다.
전문적인 싸움꾼들.
아마도 조직폭력배들일 것이다.
세아는 인터넷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했다.
'VIP 경호'
'개인 경호원'
'조직폭력배 특징'
'경호원 취약점'
검색 결과들이 화면에 쏟아졌다.
그녀는 쉴 새 없이 클릭하고,
읽고,
메모했다.
그들의 움직임 패턴.
교대 시간.
무장 여부.
그리고 가장 취약한 순간.
조성진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방패를 먼저 무력화시켜야 했다.
아니,
무력화가 아니라 우회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무모한 돌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의 허점을 노릴 것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워진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며칠간의 밤샘 조사 끝에, 세아는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조성진이 소유한 최고급 프라이빗 레스토랑.
'라 피오렌티나'.
그는 매주 금요일 밤 그곳을 찾았다.
세아의 미행 노트에는 지난 3개월간의 기록이 있었다.
금요일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총 12번 방문.
빠짐없이.
그곳은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며,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경호가 소홀해질 수 있는 맹점이 있었다.
VIP의 사생활 보호라는 명목 아래,
오히려 외부 노출이 적다는 안일함.
'그곳에 들어가야 해.'
세아는 '라 피오렌티나'에 대해 더 조사했다.
직원 구성,
채용 조건,
레스토랑 구조.
그녀는 그곳에 침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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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엽에게 도움을 요청하다
세아는 결심했다.
온몸이 아직 쑤셨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녀는 두엽의 도장을 찾았다.
도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훈련 중이던 관원들이 세아를 바라봤다.
"...저기."
한 관원이 놀란 얼굴로 세아를 가리켰다.
"얼굴이..."
세아의 얼굴에는 아직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두엽이 세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슨 일인지 안 듯하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얼굴과 몸.
절뚝이는 걸음.
두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어이..."
두엽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냉철함이 서려 있었다.
맹목적인 분노가 아니었다.
계산된 결의였다.
두엽은 말없이 세아를 의자에 앉히고,
능숙하게 상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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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다치려고 그래."
두엽의 목소리는 낮았다.
반창고를 떼내고 소독약을 꺼내 세아의 상처에 발랐다.
"쓰..."
세아는 이를 악물었다.
덜 아믄 상처가 소독약이 닿자 따가웠지만,
소리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 일…"
두엽이 세아의 얼굴을 치료하며 물었다.
"꼭 해야겠냐?"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질문은 날카로웠다.
세아는 두엽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
그녀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녀의 눈은 흔들림 없이 두엽을 응시했다.
두엽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세아의 어깨에 붕대를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그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한때는 세계 랭킹 10위까지 오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광고 모델도 하고,
TV에도 나왔다.
하지만 부상으로 은퇴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스폰서는 떠났고,
사람들은 그를 잊었다.
막막한 현실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이 어둠의 세계였다.
조직폭력배들.
그들은 그의 힘과 과거의 명성을 이용하려 했다.
그는 돈 때문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빚 독촉.
협박.
폭력.
그는 그 일을 하며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지키려던 가족도 결국 떠났다.
그래서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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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에…"
두엽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다시는 발 들이고 싶지 않아."
그가 붕대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세아는 두엽의 손을 잡았다.
"저는… 조성진을 잡아야 합니다."
세아가 두엽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법으로는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세아가 두엽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관장님은… 저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그 싸움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세아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두엽은 그녀의 눈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내던지려 했던 자신의 모습.
그는 세아가 자신처럼 파멸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저 눈빛.
막을 수 없는 눈빛.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세아 혼자서는 무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엽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를 돕기로 결심했다.
"네가 지금까지 기록한 미행 일지를 가져와 봐."
세아는 망설임 없이 가방에서 미행 노트를 꺼냈다.
낡고 두꺼운 노트.
몇 달간의 기록이 빼곡히 담긴.
두엽은 노트를 꼼꼼히 살폈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조성진의 동선.
만나는 사람들.
경호 인력의 배치.
그리고 '라 피오렌티나'에 대한 정보까지.
두엽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이거... 제법인데."
그가 중얼거렸다.
세아의 관찰력은 예상보다 뛰어났다.
"성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은..."
두엽이 노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라 피오렌티나'가 맞아."
그가 세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주방은 아니야."
"주방이 아니라고요?"
세아가 반문했다.
"응. 조성진은 주방에 들어가지 않아."
두엽이 설명했다.
"그가 가장 편안하게, 그리고 가장 많은 정보를 흘릴 수 있는 곳은 홀이야."
그가 노트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여기 봐. 네가 기록한 거. 조성진은 VIP 룸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그때 서빙 직원들이 드나들어."
"그럼..."
"홀 서빙을 맡아야 해."
두엽의 분석은 정확했다.
하지만 '라 피오렌티나'는 최고급 프라이빗 레스토랑인 만큼,
신원 보증과 경력 등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었다.
특히 홀 서빙은 고객과의 접점이 많아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신분 보증이 필요합니다."
세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저에게는 경력이 없습니다."
세아가 고개를 숙였다.
카페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고급 레스토랑 경력 같은 건 없었다.
두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한때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던 그에게는 여전히 연락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끊었던 인연들.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그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눌렀다.
손이 떨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세아를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전화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회장님..."
두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두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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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장과의 만남
며칠 후.
두엽은 '라 피오렌티나'의 한 프라이빗 룸에서 성회장과 마주 앉았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고급스러운 테이블.
와인 잔과 은식기들이 반짝였다.
성회장은 투박하지만 날카로운 눈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다.
5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회색 머리에 깊게 파인 주름.
하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예리했다.
그는 두엽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두엽이!"
성회장이 두엽의 어깨를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몇 년 만이냐!"
"5년... 됐습니다."
두엽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자네 덕분에 내가 목숨을 건졌는데!"
성회장이 두엽을 끌어안았다.
"그동안 소식 한 번 없어서 서운했어! 자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걸세!"
성회장은 과거 두엽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조직 간의 다툼에서 성회장이 습격을 당했다.
칼을 든 남자가 성회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우연히 지나가던 두엽이 선수 시절의 순발력과 힘으로 그를 구했다.
두엽 역시 상당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 덕에 성회장은 거의 다친 곳이 없었다.
성회장의 보디가드들은 모두 쓰러져 두엽이 아니였다면 성회장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성회장은 두엽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성회장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자, 한 잔 하세."
"감사합니다."
두엽이 와인 잔을 받았다.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도장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 잘됐네. 깨끗하게 사는 게 최고지."
성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성회장은 취기가 올랐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옆에 앉은 아가씨들에게 농담을 건네며 조성진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요즘 조 회장 그 양반..."
성회장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뉴 프론티어' 프로젝트 때문에 정신이 없지."
"그렇습니까?"
두엽이 관심 있는 척 물었다.
"밤낮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
성회장이 계속 말했다.
"여기도 자주 오지. 특히 금요일 밤에는 꼭 들러서 자기 사람들을 만나."
"무슨 일을 하시길래..."
"사업 얘기, 정치 얘기…"
성회장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주 그냥 시끄러워. 근데 돈은 엄청 쓰더라고."
두엽은 성회장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는 옆 테이블의 아가씨들 대화에도 귀를 기울였다.
"조 회장님 오시면 팁 후하게 주시던데?"
"응, 그치? 근데 말은 별로 안 하시더라. 항상 심각한 얼굴로 통화만 하시고."
"저번에 들으니까 뭐 입항이 어쩌고..."
조성진이 홀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어떤 종류의 술을 마시는지.
그리고 그가 가장 편안해하는 순간은 언제인지.
두엽은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분위기도 한껏 고조되었다.
이제 본론을 꺼낼 때였다.
두엽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두엽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조카가 하나 있는데..."
"조카?"
성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일에 소질이 있습니다."
두엽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라 피오렌티나'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데, 신원 보증이 까다로워서요."
두엽이 성회장을 바라봤다.
"혹시… 회장님께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성회장은 두엽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술에 취한 듯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예리했다.
사업가로서의 냉철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뭔가... 있구나.'
하지만 이내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이고, 두엽이 조카라면!"
성회장이 두엽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조카나 다름없지!"
그가 와인을 한 잔 더 마시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여기 사장한테 직접 말해두지!"
성회장이 힘주어 말했다.
"자네 덕분에 내가 살아 있는데, 이 정도 부탁쯤이야!"
성회장은 즉시 레스토랑 사장을 불렀다.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정장을 입은 50대 남자가 들어왔다.
레스토랑 사장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어, 김 사장."
성회장이 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두엽이 조카 애가 일자리를 찾는데, 여기서 일 좀 시켜줘."
사장은 성회장의 부탁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장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신원 확인이 까다로워서..."
"내 신원이 부족한가?"
김사장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회장님 조카를 제가 어떻게 감히....."
"괜찮아, 괜찮아. 지 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일 배우려는 거니까.
주방에 잠시 뒀다가 쓸만하다~ 싶으면 홀도 올려 주고"
사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홀은… 신원이 확실해야 해서요."
"주방 좋지!"
성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 잘하면 승진이나 시켜 주라고"
성회장의 호탕한 웃음에 사장도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일단 주방 보조로 채용하겠습니다."
"고맙네, 김 사장."
그렇게 세아는 '라 피오렌티나' 주방 보조로 취직하게 되었다.
사장이 나간 후,
성회장이 두엽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두엽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울 것 없어. 자네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성회장이 두엽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엽은 레스토랑을 나와 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아야, 나야."
"관장님!"
세아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묻어났다.
"일단 주방으로 들어가."
두엽이 말했다.
"거기서 실력을 보여주면 홀로 올라갈 기회가 있을 거야."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관장님!"
세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세아야."
두엽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조심해. 그리고…"
그가 잠시 멈췄다.
"혹시라도 위험하면 바로 나와. 복수보다 네 목숨이 더 중요해."
"...네."
세아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조성진을 향한 복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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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피오렌티나의 첫 출근
세아의 첫 출근일이 다가왔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검은색 유니폼.
단정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화장으로 가린 멍 자국.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발랐지만,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주방에서 일한다면 아무도 자세히 보지 않을 것이다.
거울 속의 세아는 복수에 불타는 여전사가 아니라,
성실한 주방 보조 직원처럼 보였다.
'이제 시작이야.'
세아는 심호흡을 했다.
깊게,
천천히.
긴장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라 피오렌티나'는 강남의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에 내렸다.
빌딩 숲 사이를 걸어 레스토랑을 찾았다.
건물 외관부터 범접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풍겼다.
대리석 외벽.
황금빛 간판.
정문에는 도어맨이 서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정문이 아닌 옆 골목의 직원 출입구로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1층.
직원 라커룸이 있었다.
몇 명의 직원들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세아가 인사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세아는 주방장을 찾았다.
주방은 지하 1층과 1층을 연결하는 곳에 있었다.
"저기요..."
세아가 조심스럽게 주방 문을 열었다.
"들어와."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최신식 주방 기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주방장이 칼을 갈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강세아입니다."
세아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주방장은 세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날카로운 눈빛.
"성회장님 소개로 왔다고 들었어."
"네."
"주방 일 해 본 적 있나?"
"아니요."
세아가 솔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음."
주방장은 짧게 대답하고는 다른 직원을 불렀다.
"민지야!"
"네, 주방장님!"
젊은 여직원이 달려왔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이 친구 좀 가르쳐 줘. 기본적인 것부터."
"네, 주방장님."

민지라는 이름의 여직원이 세아에게 다가왔다.
"안녕, 난 민지야."
민지는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3년째 일하고 있어."
"안녕하세요. 세아예요."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민지가 세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따라와. 설명해줄게."
민지는 세아에게 주방의 구조를 설명해주었다.
"여기가 전처리실. 식재료 손질하는 곳이야."
"저기가 냉장고. 온도 관리 철저히 해야 해."
"여기는 설거지하는 곳. 너 주로 여기서 일하게 될 거야."
세아는 조용히 따라가며 모든 것을 관찰했다.
주방의 배치.
직원들의 동선.
그리고 홀로 나가는 문의 위치까지.
"참."
민지가 세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긴 프라이빗 레스토랑이라 주방 직원은 홀에 나갈 수 없어."
"왜요?"
"VIP 손님들 프라이버시 보호 때문이래."
민지가 설명했다.
"홀 서빙은 따로 훈련받은 직원들만 할 수 있어. 신원 확인도 까다롭고."
'홀로 나가야 하는데…'
세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 해.'
그날 하루, 세아는 설거지와 식재료 정리를 했다.
단순 노동이었지만, 힘들었다.
하루 종일 서 있으니 다리가 아팠다.
상처 입은 몸으로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세아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일했다.
홀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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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났다.
세아는 성실하게 일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방장도 그녀의 성실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강세아, 일 잘하네."
어느 날 주방장이 말했다.
"이 정도면 곧 홀 서빙 교육 받을 수 있을 거야."
세아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요?"
"응. 사장님한테 추천해볼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오늘은 VIP 예약이 유난히 많은 날이었다.
세아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홀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 큰일났어!"
민지가 황급히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무슨 일이야?"
주방장이 물었다.
"서빙 직원 한 명이 갑자기 쓰러졌어요!"
민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구급차 불렀는데... 오늘 VIP 룸 예약이 꽉 찼잖아요. 어떡해요?"
레스토랑 매니저가 주방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30대 여성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
"주방 직원 중에 서빙 경험 있는 사람 없나요?"
매니저가 급하게 물었다.
직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세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홀로 나갈 수 있을까.
그녀는 손을 들었다.
"제가…"
세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해볼 수 있습니다."
매니저가 세아를 바라봤다.
"너 신입이잖아."
"네. 하지만..."
세아가 침착하게 말했다.
"카페에서 서빙 경험이 있습니다. 할 수 있어요."
매니저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좋아."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긴급으로 투입하겠어. 실수하지 마."
"네!"
"민지, 세아한테 빨리 유니폼 주고 홀 규칙 설명해줘."
"네!"
민지가 세아의 손을 잡고 라커룸으로 뛰었다.
"와, 세아야. 운 좋다!"
민지가 홀 서빙 유니폼을 꺼내며 말했다.
"보통 몇 달은 걸리는데."
세아는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블라우스와 치마.
거울을 보니 단정하고 우아한 서버의 모습이 비쳤다.
민지가 급하게 세아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VIP 손님들한테는 절대 먼저 말 걸지 마."
"네."
"불리면 가고, 아니면 조용히 서빙만 해."
"알겠어요."
"표정 관리 잘하고, 항상 미소."
"네."
"그리고 오늘…"
민지가 세아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조 회장님 오신대."
조 회장.
조성진.
세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를 마주할 기회가 왔다.
"아주 중요한 손님이니까 실수하지 마. 알았지?"
"네... 알았어."
"괜찮아?"
민지가 걱정스럽게 세아를 바라봤다.
세아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응, 괜찮아."
세아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긴장돼서 그래."
"괜찮아. 천천히 하면 돼."
민지가 세아의 등을 두드렸다.
세아는 심호흡을 하고 홀로 향했다.
문을 밀고 나갔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부드러운 조명이 레스토랑 전체를 감쌌다.
고급스러운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흰 테이블보, 은식기, 크리스털 와인 잔.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VIP 룸 중 하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성진의 목소리였다.
세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진정해. 지금은 아니야.'
그녀는 자신을 다독이며 조용히 홀을 걸었다.
매니저가 세아에게 다가왔다.
"저기 3번 테이블 물 갖다 드리고, 4번 테이블 메뉴판 가져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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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는 침착하게 일을 시작했다.
물을 따르고, 메뉴판을 나르고, 주문을 받았다.
그리고 조성진이 있는 VIP 룸 앞을 지나갔다.
여접대원이 들어가는 문틈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말쑥한 정장을 입고,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며 웃고 있는 조성진.
그 옆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정치인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들.
그리고 비서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들.
"...입항은 다음 달 15일입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좋아."
조성진의 목소리.
"이번 건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세아는 귀를 기울였다.
'뉴 프론티어 프로젝트… 입항… 다음 달 15일…'
그녀는 이 정보를 머릿속에 새겼다.
"저기."
지나가던 매니저가 세아를 부른다
"네!"
세아는 재빨리 그쪽으로 향했다.
"3번 룸 주문서야. 주방으로."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세아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물을 가지러 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금 들은 대화가 맴돌고 있었다.
'다음 달 15일. 입항. 뉴 프론티어.'
이것은 조성진의 음모를 밝혀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세아는 그날 밤, 조성진이 레스토랑을 떠날 때까지 조심스럽게 그를 관찰했다.
그의 동선.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나누는 대화의 단편들.
모든 것이 그녀의 복수 계획에 중요한 퍼즐 조각이 되고 있었다.
밤 10시.
조성진이 레스토랑을 떠났다.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세아는 주방으로 돌아와 유니폼을 벗었다.
손이 떨렸다.
오늘 그를 봤다.
그를 가까이서 봤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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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15일...'
무슨 날일까... 어떤 날일까..
나는 그 전에 조성진의 옆에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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