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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좀 그만해! 엄마의 잔소리

2화. 엄마가 죽은 날부터 나는 죽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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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는 정장을 입은 채,

건물 맞은편 커피숍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거의 다 녹아버려

희멀건 얼음물만이 컵을 채우고 있었다.

 

커피는 핑계였다.

 

오늘도 그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은 것이다.

 

테이블 위엔 작은 수첩이 놓여 있었다.

 

남색 가죽 커버에 금박으로 날짜가 새겨진 수첩.

 

그 안엔 조성진의 이름 아래 줄줄이 시간과 장소가 나열돼 있었다.

 

모든 미행은 규칙처럼 정리돼 있었다.

 

[3 3일 화]

오전 10 40분 출근 회의실 2,

1시간 후 빠져나옴 오후

 

6 50 '몽블랑' 바 동석자 2:

남성 40대 후반 추정,

고급 수트 착용 대화

주제: 부동산 개발 (녹음 실패) 자정 귀가,

도곡동 힐하우스 B

 

그 수첩은 곧 조성진의 '범죄 이력서'였다.

 

법이 증거를 못 잡는다면,

내가 잡아야 한다.

 

이건 세아의 다짐이자,

기도이자,

고백이었다.

 

"아니야. 너 같은 인간은, 법에 맡겨선 안 돼."

 

그녀의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첩 옆에는 붉은색 펜 하나와,

접힌 신문 한 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신문 기사 제목은 이랬다.

 

「청년 CEO 조성진, 미래산업연합 회장 취임」

 

엄마 사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웃기고 있네."

 

세아는 붉은 펜으로 기사 위

가해자의 얼굴을 시커멓게 칠했다.

 

마치 눈을 가리듯,

입을 막듯,

고통을 덧씌우듯 칠해나갔다.


세아의 뒤, 보이지 않는 곳.

 

정윤이 서 있었다.

 

딸의 어깨 너머로 수첩을 들여다보던

정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아야… 이 기집애가 증말…"

 

하지만 세아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조성진의 얼굴을 칠해나갔다.

 

정윤은 딸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은 허공을 통과했다.

 

"엄마 목소리 안 들려? 엄마 여기 있어. 여기 있다고!"

 

정윤은 소리쳤지만,
세아는 여전히 수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너 그러다 다쳐. 아니, 죽을 수도 있어. 복수는 무슨 복수야!"

 

정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행복한 거야. 웃는 거야."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런 평범한 게 좋아. 복수 따위…"

 

정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영혼이라 눈물은 없었지만.

 

그때,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립니다."

 

태승이었다.

그는 언제 나타났는지 정윤 옆에 서 있었다.

 

"…알아요. 알아요!"

 

정윤은 태승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알지만 그래도! 말을 해야 마음이라도 풀리잖아요!"

 

태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윤 씨. 이제 정말 가셔야 합니다."

"싫어요."

"세아 씨는저렇게 살 겁니다. 계속. 정윤 씨가 여기 있어도, 없어도."

 

태승의 말에 정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어떡해요.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태승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어딘가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정윤은 다시 세아를 바라봤다.

 

딸은 여전히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조성진 동선 파악 완료. 다음 단계: 접근.'


조성진은 일관된 루틴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는 대부분 오전 10시가 넘어 출근하고,

점심은 빼먹기 일쑤였으며,

퇴근 이후엔 늘 누군가와 술자리를 가졌다.

 

접대이거나 혹은 유흥이었다.

 

어떤 날은 아내가 동석했고,

어떤 날은 젊은 여성들이 깔깔거리며 그의 팔짱을 꼈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정'인 날은 금요일이었다.

 

매주 금요일 밤 9 10.

 

그는 '라 피오렌티나'라는 고급 와인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11 55분경,

기분 좋게 웃으며 가게를 나섰다.

 

대리기사는 그보다 5분 먼저 도착했고,

성진이 나오면 차량을 정문 앞으로 끌고 갔다.

 

이 모든 장면이 반복됐다.

 

세아는 이 패턴을 정확히 5주간 기록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금요일.

 

세아는 검은 야상 점퍼에 모자를 눌러쓴 채,

그의 차 뒤편에 숨어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주차장 한 켠에선 가게 종업원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고래꼬리 모양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린다.

 

그건 엄마 정윤이 세아의 생일 선물로 몰래 사두었던,

엄마의 유품에서 발견한 목걸이였다.

 

고래꼬리 펜던트의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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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의 회상]

"아유 우리 세아 한글도 이쁘게 쓰네~"

 

정윤이 어린 세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어린 세아는 학교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여 꺼내서

정윤 얼굴에 펼쳐 보인다.

 

받아쓰기 100점 시험지.

 

어린 세아가 배시시 웃으며

가게 방 한쪽 벽을 손으로 가리킨다.

 

정윤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냉큼 일어나 방에 가서 종이 하나를 들고 나온다.

 

중국집에서 나누어 준 스티커판이다.

 

거기에는 포도송이가 그려져 있고,

거기에는 중국집 스티커 대신 알알마다 고래꼬리가 그려져 있다.

 

빈 칸에 고래꼬리를 그려 넣는 정윤.

 

이제 빈 칸은 2개이다.

 

어린 세아는 입꼬리가 째지게 웃으며 말한다.

 

"탕수육까지 이제 2"

 

하며, 손가락 2개를 정윤에게 내민다.

 

정윤은 그런 세아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현재]

고래꼬리는 그랬다.

 

엄마와의 추억이고,

지금은 엄마다.

 

적어도 세아에게는.

 

"엄마나 곧 갈게. 저 새끼 죽이고 나도 갈게."

 

눈물이 뜨겁게 고였다가, 찬비에 식는다.

입술을 질끈 깨문다.


정윤은 세아의 뒤에 서 있었다.

 

딸이 칼을 품고,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정윤은 세아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몸은 허공을 통과했다.

 

"세아야! 안 돼! 그러지 마!"

 

정윤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세아는 듣지 못했다.

 

"너 그러다 죽어! 저 사람은 경호원들이 있어! 혼자 어쩔려그래!"

 

정윤은 세아의 손을 잡으려 했다.

 

칼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발제발 하지 마…"

 

정윤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차량의 잠금 해제 소리가 들렸다.

 

대리기사가 나타났다.

 

세아는 숨을 죽인다.

 

성진의 캐딜락.

 

검정색 고급 SUV,

뒷범퍼엔 골프장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대리기사가 차문을 열고 차에 타려던 순간,

세아는 뒤에서 각목을 들어 그의 뒷통수를 내리쳤다.

 

''

 

무너진 그의 몸을 차 뒤로 끌어낸다.

 

"미안해요, 정말미안해요."

 

피 한 방울 안 튀었지만,

그녀는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내가사람을…'

 

정윤은 그 장면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세아야! 안 돼!"

 

하지만 세아는 이미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진을 죽이기 위해선 착하면 안 된다.

 

좋은 사람이면 안 된다.

 

차에 올라탄 세아는 심호흡을 한다.

 

거울을 본다.

 

그리고 차를 돌린다.

 

11 56.

 

'라 피오렌티나' 정문.

 

세아는 대리기사처럼 차를

정확히 정문 앞으로 대었다.

 

잠시 후,

가게 문이 열리고 성진이 종업원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나온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취해 있었다.

 

걸음도 비틀거리고,

종업원들에겐 연신 팁을 뿌려댔다.

 

"좋아 좋아~ 오늘은 기분이다~ 그래 그래~ 나는 말이지~"

"돈 되지, 능력 되지~ 아씨 나 진짜 오짐~ 하하하하~"

 

입에서 술 냄새와 자기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세아는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기분 좋은 날 죽여줄게.'

 

종업원은 차 문을 열었고,

성진은 뒷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어잇, 뭐야~ 오늘은 여자 기사야? ~ 니 팔자도 드세다 드세."

"이 시간에 대리기사라니~ 야야 출발해. 출발해버려~"

 

세아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출발한다.

 

이제 끝이다.

 

정윤은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며 절규했다.

 

"안 돼! 세아야!"

 

그녀는 차를 쫓아 달렸다.

 

하지만 영혼의 몸으로는 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태승 사자님! 태승 사자님!"

 

정윤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곧 태승이 나타났다.

 

"이정윤 씨, 왜 그러세요."

 

"세아가! 세아가 사람을 죽이려 해요!"

 

정윤은 떨리는 손으로 차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막아주세요! 제발!"

 

태승은 정윤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승사자는 산 자의 일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떡해요! 내 딸이 살인자가 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

 

태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정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윤은 주저앉았다.

 

영혼이라 무릎이 꺾일 리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이 꺾였다.

 

"제발제발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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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5.

'라 피오렌티나' 맞은편 골목.

서울지방경찰청 강력 2팀 박찬성 형사는

차 안에서 커피를 들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형사 현우가,

뒷자석에는 성호가 앉아 있었다.

 

"오늘도 같은 패턴이네. 역시 금요일이야."

"저놈, 지금까지 여기서 술 먹은 것만 열일곱 번째예요. 근데 왜 하필 이 와인바에만 매주 오는 걸까요?"

"뭐가 있긴 있어. 아니면 여기가... 무슨 뒷거래 장소거나."

"아니면 내연녀지. 그게 제일 확률 높아."

 

찬성은 창밖을 응시하다 문득 시선을 고정했다.

 

"...저거. 누구지?"

 

맞은편 차량 운전석.

 

모자를 눌러쓴 사람,

옆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불빛에 드러난 윤곽.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 저거... 막내 아니지?"

 

성호가 뒷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어 확인한다.

 

", 아닌데. 우리 막내 아닌데."

"아 씨...그럼 누구냐고. , 너 가서 막내 확인해."

 

성호가 차에서 내리고, 현우는 운전대를 잡았다.

 

찬성은 여전히 뭔가 꺼림칙했다.

 

그 얼굴... 어디서 봤지?

 

참고인? 증인? 조성진 측근?

 

생각이 흐려지려던 찰나,

차량이 출발한다.

 

", 움직인다. 붙자."

"."

 

현우가 차를 몰아 성진의 차 뒤로 붙는다.

 

차는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성진의 캐딜락은

예상보다 속도가 붙어 있었다.

 

"대리" 치고는 꽤 능숙했다.

아니, 너무 능숙했다.

 

전형적인 대리기사의 운전이 아니다.

 

직선도로에서 살짝 꺾이는 곡선 구간,

과속방지턱 위로 튀어오르는 차체.

 

너무 빠르다.

 

"저거... 이상하지 않아?"

"지금까지랑 다른데. 속도 좀 봐. 평소 대리 운전이 아닌데?"

 

운전석의 현우가 중얼거렸다.

 

"속도계 좀 봐. 일반 대리라면 절대 저렇게 못 밟지."

 

교차로 하나를 지난 뒤,

캐딜락은 예상보다 빠르게 좌회전하며 속도를 높였다.

 

"대리 아니야. 저건 도망이야."

 

찬성의 말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차량 속도를 높였다.

 

", 도망치고 있는 거 맞지? 근데 왜?"

 

찬성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모퉁이를 돌던 캐딜락의 후미가 급격히 꺾였다.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차량이 흔들리며

중심을 잃기 직전이었다.

 

"저 새끼 눈치채고 튀는 거야. 박아."

"?!"

"받아! 지금 아니면 놓쳐!"

", 알았어."

 

현우는 찬성의 말에 망설임 없이 핸들을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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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이이이익——!!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

 

부딪힌 캐딜락은 45도 각도로 밀려나며

도로 옆으로 틀어졌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음과 함께

캐딜락은 도로 옆으로 밀려났다.

 

앞부분이 가로등 기둥에 부딪히며

차체가 찌그러졌다.

 

세아는 충격에 잠시 숨이 멎었다.

 

백미러 너머,

뒷좌석에 누운 성진은 의식이 없었다.

 

피는 없지만,

축 늘어진 고개와 열린 입술.

 

"...죽은 건가?"

 

그 생각이 들려는 순간,

운전석 문이 거칠게 열렸다.

 

", 뭐야!"

 

세아는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팔을 비틀며 누군가가 그녀를 바닥에 눕힌다.

 

"나와!"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얼굴.

 

낯이 익다.

 

집으로 유가족 조사 왔던,

그 형사.

박찬성.

 

"당신이... ..."

 

찬성도 가까이에서 보니

확실히 기억이 났다.

 

"강세아?"

 

찬성은 세아를 일으켜 세운다.

 

마른 체구,

그러나 눈빛은 매서웠다.

 

"...뭐하는 겁니까, 지금? 뭐 복수라도 해요?"

"...하면 안 됩니까?"

"이게 복수입니까? 자살행위지!"

"상관없어요. 그 새끼만 죽일 수 있으면"

"강세아 씨. 이건 이런 방식으로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저 새끼는... 법을 비웃어요. 저 인간은... "

 

"엄마를 죽이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살고 있어요."

 

"그걸 보고도, 그냥 있으란 말이에요?"

 

"이봐요! 자기 목숨 걸고, 이게 무슨! 당신 어머님이 그걸 바랄까요?"

 

세아는 아무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찢어진 입술,

가쁜 숨.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시선.

 

"당신 때문에 다 망가질 뻔했어요."

 

"몇 달 잠복 수사 날아갈 뻔했고, 조성진은 이 틈에 또 도망갈 수도 있어요. 그리구 당신!"

 

찬성은 이어 말한다.

 

"이렇게 살지 마요. 돌아가신 어머님이 참 좋아하시겠어요."

 

'...그래. 다음엔 안 걸리고... 끝까지 죽일 거야.'

 

정적.

 

둘 사이의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그때,

차가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가 조성진의 차를 몰고 빠져나간다.

 

찬성은 조성진의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세아를 바라봤다.

 

그 심정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이건 아니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요. 복수는 무슨! 에이"

 

세아는 무릎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손이 떨리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입술에서 나온 첫 마디는,

 

"엄마... 미안해..."

 

차로 돌아가던 찬성이 그런 세아를 바라본다.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을 듯하다.

 

세아를 일으켜 차에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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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정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유 다행이네, 다행이야. 저 형사는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더라니까."

"근데 애한테 좀 친절하게 말하지. 안 그래도 마음 약한 애한테…"

 

바로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살인은, 의도만으로도 지옥입니다."

 

태승이었다.

 

정윤은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태승이 손을 휘젓자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누가 못 해서 안 하는 줄 압니까? 내가 저승사자 짬밥이 얼만데. 이제 그만 갑시다."

 

정윤이 이를 꽉 다물며 말한다.

 

"자식이…… 사람을….. 죽인대요….. 사람을…… 그걸 두고 가요?"

"엄마가,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은 자식 없어요?"

 

정윤을 잡아끌던 태승이 움찔한다.

 

그 새 정윤의 몸이 풀린다.

 

방심한 태승의 손을 뿌리치고

정윤이 저만치 뒷걸음질을 친다.

 

정신 차린 태승은

 

"저승사자가 자식이 어딨습니까?"

"!"

 

정윤이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는 듯이

탄성을 낸다.

 

"그래요, 없어서 모를 수 있지만, 인지상정 아닌가요."

"살인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자식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냐는 말이지."

"나 진짜 이 세상에는 미련 없어요. 우리 세아, 세아한테 나 잊고 잘 살라고, 그거 한 마디만 하면 갈게요. ?"

 

태승이 정윤을 잠시 쳐다본다.

 

"혹시 이런 말 들어봤어요?"

 

정윤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인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삶에 관여하면 안!!! 는 말!"

 

단호한 태승이지만 정윤도 만만치 않다.

 

다시 태승이 말하려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태승의 시선이 돌아갔다.

 

"자기야~ 여기야 여기"

 

길 건너에서 한 여자가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한 손으로는 산달에 가까워 보이는 배에 손을 얹고서.

 

그 모습에 태승은 잠시 누군가의 생각에 잠긴다.

 

[태승의 회상]

"서방님~"

 

개울 건너에서 태승을 보며 손을 흔드는 한 여자.

 

단아한 쪽진 머리에 연분홍 한복을 입은 여자는

자신의 허리에 한 손을 얹고 한 손은 태승을 향해 흔들고 있다.

 

[현재]

태승의 눈은 길 건너편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여자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태승은 다시 여자를 바라본다.

 

흠칫.

 

태승의 눈은 여자의 뒤로 향했다.

 

여자의 뒤로 자전거 한 대가 내려오고 있다.

 

자전거에 미숙한 청년이 내리막길을 위태롭게 내려오고 있다.

 

여자도,

여자의 남편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자전거가 이대로 내려오면 여자를 친다.

 

내리막길이라 점점 속도가 붙고 있고,

청년은 핸들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인지할 틈도 없이 태승의 몸이 날아 자전거 앞에 섰다.

 

손을 뻗어 자전거 앞으로 내밀자 자전거의 속도가 줄었다.

 

", 선다. 선다~"

 

청년은 반갑다는 듯이 화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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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은 한심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뒤를 보니 이내 여자는 남편을 만나

자전거의 궤도에서는 사라졌다.

 

태승은 속도가 많이 줄어든 자전거를 향해 손을 휙 젓는다.

 

자전거가 휘청이다 이내 옆으로 쓰러진다.

 

"아이씨….. 이번엔 되나~ 했다."

 

태승은 여자와 남편이 사라진 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윤의 얼굴이 휙 나타난다.

 

"아이, 깜짝이야. 왜 그래요, 저승사자 놀라게"

"지금, 지금 그거 어떻게 한 거에요?"

 

정윤이 태승이 손을 내밀었던 행동을 흉내 내며 묻는다.

 

태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딴청이다.

 

"아이 이거요, 이거. 이렇게 하니까 자전거가 막 속도가 줄고, 옆으로 넘어지고 막 그러던데."

"그게, 그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 그거 가르쳐 줘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면 누군가는 할 수 있는 거구,"

"태승 사자는 할 수 있으니까 나를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내가 그거 배워서 우리 세아한테,"

"그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구 산 자의 삶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 그럼 아까 저 자전거는 저승에서 온 거였구나~아까 그 새댁도 죽은 사람이고?"

 

태승은 할 말을 잃었다.

실수한 것은 맞으니까.

 

정윤은 알았다는 듯이 말한다.

 

"알았어요. 알았어. 저승 갈게요"

"진짜요?"

"그럼요. 저승 가서 하느님이든, 염라대왕이든 만나면 태승 사자가 막 산 자의 삶에 관여하고 막 그랬다고 얘기할게요"

 

정윤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태승이 좀 전에 한 행동을 막 흉내 내며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태승은 정윤의 속내가 무엇인지 안다.

 

저승에 가서 하느님이든 염라대왕이든 일러바쳐도 상관없지만

그걸 약점이라고 잡고 있는 정윤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알려 주면 배울 수는 있구요?"

 

"어머 어머 나 이래뵈도 전교 탑 안에 들던 머리였어요. 우리 동네에서 영재라는 별명도 있었구요."

"함 믿어봐요 수제자 하나 키워봐요, 얼마나 잘하나."

 

태승은 이미 마음을 먹었지만 쉬운 길이 아니니

정윤의 마음도 확인해야 했다.

 

그래,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까.

 

같은 아픔으로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헤메다 결국 저승사자의 길을 택한 태승이였다.

 

[태승의 회상]

깊은 밤.

조선 시대.

 

한 양반가의 집이 불타고 있다.

 

임신을 하고 있던 여자는 어느새 나이가 들었고

15세 정도의 사내아이를 광에 숨기고 있었다.

 

문을 나서다 괴한에게 칼을 맞는다.

아이는 입을 틀어막고 운다.

 

여인은 치윤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읊조렸다.

 

'숨어. 아가. 들키지 마라..... 우리 아기.....'

 

[현재]

태승은 정윤을 빤히 바라보다 말한다.

 

"정말 따님에게 뜻만 전하면 가는 겁니다."

"그럼요, 그럼요. 저 불평도 안 해요. 딱 한 가지만 전달하면 저 미련없어요. 바로 갑니다"

"좋아요. !"


그날 밤부터 정윤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중음계.

하얀 안개가 자욱한 들판.

 

정윤은 태승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있었고,

태승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정윤 씨. 우선 '영혼의 흐름'부터 느껴야 합니다."

"영혼의 흐름이요?"

".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타야만 이승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정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들었다.

 

", 눈을 감고 집중하세요. 그리고 세아 씨를 생각하세요."

 

정윤은 눈을 감았다.

 

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세아.

복수에 불타는 세아.

 

"느껴지세요? 세아 씨의 기운이?"

"아니요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요?"

 

태승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천히 해봅시다."

"아니 그럼 얼마나 걸리는데요?"

"사람마다 다릅니다. 빠르면 몇 달, 늦으면 몇 년…"

"몇 년?!"

 

정윤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그 사이에 세아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래서 열심히 하셔야죠."

 

태승은 단호하게 말했다.

 

정윤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세아야엄마가 꼭 너한테 말할 거야. 조금만 기다려.

복수 같은 거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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