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생일날,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1화. 생일날,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아는 식탁 의자에 다리를 올린 채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편하게 티셔츠 차림으로,
머리는 질끈 묶고 있었다.
그녀의 앞엔 반쯤 먹다 남긴 토스트와 머그잔에 담긴 미지근한 커피.
식탁 맞은편엔 그녀의 엄마, 정윤이 설거지를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올해 생일도 둘이네. 어떡해, 너 친구들이라도 불러~"
정윤의 농담에 세아가 피식 웃었다.
"귀찮아. 난 엄마랑 보내는 생일이 제일 좋거든요?"
"아이고, 이쁜 웬수. 말은 참 잘해요."
둘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웃었다.
27살 딸과 55살 엄마는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늘 티격태격하면서도 정이 넘쳤다.
주말이면 함께 예능을 보고,
밤이면 같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세아는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특별할 것 없는 생일 아침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정윤은 외출 준비를 했다.
분홍색 가디건을 걸치고,
단정히 머리를 묶으며 말했다.
"금방 갔다 올게. 너 초코무스 케이크 좋아하잖아. 예쁜 걸로 사올게."
"딸기 올라간 걸로 부탁해요. 촛불은 스물일곱 개까진 말고 세 개만 꽂아줘요. 귀찮으니까."
"알았어, 주문도 디테일하다."
세아는 엄마를 배웅하며 현관 앞까지 나갔다.
정윤은 딸의 볼을 살짝 꼬집고 웃으며 나섰다.
그 웃음이, 마지막이었다.

사고는 오후 네 시 반,
번화한 대로변에서 발생했다.
검은색 SUV 차량이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했고,
인도를 걷던 정윤은 그대로 튕겨 나갔다.
목격자의 비명, 멈춘 차량, 피를 머금은 꽃다발.
응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정윤은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의 몸은 피투성이였지만
아직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119구급대원은 정윤의 휴대폰을 통해
가장 가까운 보호자인 세아에게 연락했다.
세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잡아탄 택시에서 창밖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손은 떨렸으며 심장은 속도를 잃은 듯 둔하게 뛰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정윤은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상태였다.
간호사는 급하게 보호자 동의를 요구했고,
수술 동의서에 서명한 세아는 그대로 대기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수술실 앞.
하얀 형광등 아래,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벽에 붙은 텔레비전에서는 엄마와 자주 보던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왔지만,
웃음소리는 먼 세계의 이야기처럼 멍청하게 울려 퍼졌다.
세아는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기도도 하지 못했고,
울지도 못했다.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얼어붙어버린 듯했다.
그저 수술실 위 전광판에 '수술 중'이라는 네 글자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
세아의 절친 윤지였다.
주저앉은 세아를 보며 윤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세아 옆에 같이 앉아 있는 것 밖에는...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의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고,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만이 폐부를 찔렀다.
세아는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등받이에 등을 붙인 채 눈을 감았다.
'엄마는 괜찮을 거야. 엄마는 웃는 사람이니까.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알 거야.'
그러나 그 믿음은,
곧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함께 무너졌다.
장례식장 안은 분주했다.
새하얀 국화가 가득한 입구,
연신 피어오르는 향 냄새.
검은 유니폼을 입은 상조 직원들이
윤지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며 부지런히 발을 옮기며 제단을 꾸미고,
의자를 정리하고,
조문객의 동선을 안내했다.
꽃바구니에는 각종 이름표가 붙어 있었지만,
세아는 그것을 읽지 않았다.
세아는 검은 정장을 입은 채,
의자에 깊게 파묻혀 있었다.
눈은 텅 비었고,
손은 힘없이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드는 듯했지만,
곧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속상하게 말고… 억장이 무너지겠다."
"밥 먹어야 버틴다 응?"
조용한 수군거림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마저 멀게만 느껴졌다.
보다 못한 윤지가 다가와 세아를 이끌어 식당 자리에 앉힌다.
"먹어, 먹어야 버텨. 입이 써도 삼켜."
국에 밥을 꾹꾹 말아 한 숟가락 떠
세아 입 앞으로 가져가지만 세아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여전히 국화 한 송이를 손에 쥔 채,
마치 그것이라도 놓치면 엄마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얼굴로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었다.
제단 위 사진 속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럽게 들락날락했고,
그 틈 사이로 세아는 마치 풍경 속 그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도,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현실도.
모든 게 꿈 같았고,
깨어나지 않는 악몽 속에 갇힌 듯했다.
한편, 정윤은 떠나지 못했다.
사고 직후부터 줄곧 세아 곁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가 아무런 물리력을 갖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딸을 안고 싶었다.
따뜻하게 감싸 안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고,
목소리를 높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력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정윤이 이승에 머문 지 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수트는 몸에 딱 맞게 떨어졌고,
머리는 깔끔히 빗어 넘겼으며,
은빛 시계가 번뜩였다.
모델처럼 잘생긴 얼굴에
냉정한 분위기를 두른 남자였다.

정윤은 순간 흠칫 놀라며 눈이 커졌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그가 정윤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 설마?"
"네. 제 직업은 흔히들 알고 계시는 저승사자, 최태승입니다."
"어머, 저승사자가 이렇게 잘생겨도 되나? 요즘은 이런 스타일로 뽑나 봐?"
그는 익숙하다는 듯 살짝 웃었다.
"요즘은 이미지도 중요하니까요. 무서우면 따라가겠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건 그렇고 이정윤 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정윤은 눈을 찌푸렸다.
"어머 생긴 것만큼 매너는 아니시네. 아니, 지금 우리 딸애가 혼자 울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요."
태승은 익숙하다는 듯이
"아, 예, 예 그러실 수 있죠 네 네."
"나, 그럼 안 가도 되요?"
저승사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에헤~ 설마요. 가셔야죠. 그 몸으로 여기 너무 오래 머무르면 몸 안 좋아져요."
"지금 내가 죽었는데 뭐가 더 안 좋아진다는 거야?"
정윤은 손을 허리에 얹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구 뭐 안 좋아지고 말고. 세아 혼자 두고 난 못 가요. 겁도 많고 아직 어린데."
"스물일곱이시잖아요. 법적으론 성인이시고요."
"법적으로나 성인이지 애가 아직, 애잖아요."
태승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 보세요."
그가 손을 들어 정윤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정윤은 날렵하게 뒤로 물러났다.
"어머 어머, 어디 여자 몸에 손을 막. 지금도 기분이 뒤숭숭한데, 건드리면 뭔 짓을 할지 몰라요."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태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어쩌시려구요?"
"여기 좀 있다 갑시다 네? 애가 밥은 먹어야지.... 그쵸?"
정윤은 그대로 달려가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태승은 길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또 갔네, 갔어. 아... 아줌마 배정은 힘들다니까."
며칠 후,
세아는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무거운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케이크를 사러 나가던 엄마가 문을 나섰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신발장 한켠에 정윤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식탁 위엔 사지 못한 초코무스 케이크 대신 차가운 커피 잔이 그대로였다.
식탁을 바라보는 세아 뒤에 윤지가 얼른 앞서 나와 식탁을 정리한다.
"들어가, 들어가 누워. 응? 내가 금방 뭐 좀 해 줄게."
세아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틀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커튼도 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세아야, 밥 좀 먹자. 이러다 너 쓰러지면… 엄마가 진짜 화낸다?"
정윤은 안절부절못하며 딸의 옆을 서성거렸다.
손을 뻗어 볼 수도 없고,
몸을 흔들 수도 없다는 사실이 더더욱 미치게 했다.
"야, 저기 라면 끓여놨다 치고 냄새만이라도 맡아봐. 계란 탁 깨서 반숙으로 익힌 그 라면 알지? 너 그거 좋아하잖아. 윤지야, 애 그것 좀 해 줘라."
하지만 세아는 미동도 없었다.
정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일에 미역국도 끓여줄걸… 케이크만 사러 나가질 말고…"
멍하니 있던 세아가 분주한 윤지에게 한 마디 한다.
"너 가... 고마워... 가...."
"아니 나 며칠 있을게. 그래도 괜찮아. 우리 신랑이 그러랬어."
"아냐, 가. 혼자 있고 싶어."
쫓겨나듯 윤지가 나가고 세아는 그대로 현관 앞에 주저앉는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짧고 명확한 소리였다.
"뭐 놓고 갔어?"
문을 열자, 단정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울지방경찰청 강력 2팀 형사, 박찬성입니다. 가해자 관련 조사로 몇 가지 여쭐 게 있어서요."
세아 뒤에 있던 정윤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세상에, 요즘 형사는 인물 보고 뽑나? 남자답게 그냥 어 시원~시원하게, 응?"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고, 찬성은 공손하게 명함을 건넸다.

정윤은 뒤따라 들어가며 혼자 재잘댄다.
"세아야, 너 이상형이다 이상형. 응? 커피라도, 아니지 뭐가 없지 없어. 나가서라도,"
찬성이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지금 병원에서 가해자 음주 상태 확인됐고, 차량 블랙박스도 확보했습니다. 가족분께는 부담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피해자 유족 진술도 절차상 필요해서요."
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말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형사의 말투가 조심스럽고 따뜻해서 무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윤도 찬성이 마음에 든다.
혼자 남겨질 세아 옆에 있어도 좋을 거 같은 따뜻한 느낌이 드는 찬성이다.
"이 형사 마음에 드네. 말투 봐. 저 눈빛도 그렇고. 어우, 저건 진짜… 사윗감이야. 이 딸은 눈도 안 마주치네, 아이고."
정윤은 팔짱을 낀 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얘를 어떻게든 밥을 먹게 해야 하는데…"
조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 형사는 간결하게 절차를 설명했고,
최대한 세아가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말을 아끼는 세아에게 무리한 질문은 하지 않았고,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세아는 아무 말없이 천천히 다시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무표정한 얼굴,
감정의 결을 잃은 눈동자.
숨은 쉬고 있었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정윤은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작게 중얼거렸다.
"세아야… 너 진짜 이럴 거야? 응? 언제고 엄마는 죽지. 그냥 그게 좀 빨랐어. 세상 일은 다 그래. 예고 없이 일어나는 거야. 너 이렇게 누워 있는 거… 엄마 너무 속상해."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정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저 곁에 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몇 달 후,
법정 안.
세아는 증인석 옆 유족석에 앉아 있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양손은 무릎 위에서 꽉 쥐어져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검은 정장 차림.
차가운 시선으로 피고인석을 바라보았다.
피고인은 법정용 수의를 입지도 않았고,
어딘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의 옆엔 이름만 들어도
법조계에서 유명한 전관 변호인이 앉아 있었다.
판사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능숙했다.
가해자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흐느끼는 척했다.
연한 회색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가볍게 눌렀다.
진심이 담긴 울음이라기보다
계산된 연기처럼 보였다.
"유족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지금도 매일 반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 잘못을 평생 안고 살아가겠습니다."
법정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고개를 든 가해자의 입가,
분명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눈가는 일그러져 있었지만,
입술 끝은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순간 세아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리고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무죄."
판결봉이 내려쳐지는 순간,
온몸이 부서졌다.
믿을 수 없는 판결에 법정 뒤편에서
누군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세아는 그대로 굳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판사를 바라보았다.
세아 손을 잡고 있던 윤지가 경악을 한다.
"말이 돼? 이게 무죄라고? 어떻게 그래? 응?"
정윤은 세아 옆에 앉아
가해자가 아닌 세아를 바라보고 있다.
"아구... 우리 딸 죽네, 죽어...."
그녀는 순간 본능적으로 세아를 안으려다,
그저 공중을 손으로 휘젓고 말았다.
"괜찮아, 세아야. 엄마는 괜찮아. 사람은 실수도 하는 거구. 저 사람 벌받는다고 엄마가 살아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엄마는 괜찮아. 숨 쉬어. 응? 숨 쉬어. 우리 딸....."
시간은 잔인하게 흘러갔다.
1심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곧장 열린 항소심에서조차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전관 변호사가 자리를 지켰고,
가해자는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침묵과 눈물,
고개 숙임을 적절히 반복했다.
"피고, 무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아는
모든 소리를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법은 무너졌고,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단 한 번의 상식도 없었다.
법정 밖.
가해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법정을 나섰다.
옆에 선 변호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역시는 역시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인데도
세아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세아는 법정 문 앞에 서 있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었고,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 가장자리는
벌겋게 타올랐고,
한쪽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깨는 조금씩,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세아를 바라보는
정윤의 가슴은 무너진다.
정윤은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눈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지만,
그 몸짓은 눈물보다 처절했다.
"이 등신, 등신. 왜 그걸 못 보고 피하질 못해서.. 이런 일을 만드나... 왜 우리 딸 가슴에 못을 박나... 이런 등신....."
정윤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무력했다.
자신 때문에 망가져 가는 딸을 보며
몸도, 말도, 다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세아야… 엄마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엄마가 있어…"
그녀는 허공 속
딸의 어깨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닿지 않았다.
그 순간.
조용한 기척 하나.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잘생긴 저승사자가 다시 나타나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고 조용한 얼굴.
그러나 이번에는 살짝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이정윤 씨, 이쯤 되면 이제 가셔야 하는 거 아시죠."
정윤은 뒤도 안 보고 말했다.
"안 가요. 못 가요."
"여기 있으면 계속 이런 일만 반복됩니다. 계속 아플 거예요. 그 고통이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깊어져요."
정윤은 눈물겨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딱 한 숟갈만. 얘가 밥 한 숟갈만 뜨면 갈게요. 진짜예요. 약속."
저승사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숟가락,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숟가락일 것 같은데요."
정윤은 웃으며 대꾸했다.
"암만 무거워도 들려야죠."
밤이 깊어지고,
방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조명이 꺼진 채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커튼 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아는 침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감싸 안고,
마치 뼈마디 하나하나를 조이고 있는 듯한 자세로.
정윤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너져가는 딸의 모습에
마음이 조각처럼 부서지는 듯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더해질수록,
그녀의 눈빛은 점점 애달파졌다.
그런데 그때,
세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윤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얼어붙은 조각상이 미세하게 움직이기라도 한 것처럼.
세아는 조용히 침대를 내려와
맨발로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고,
서랍을 열어 공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펜을 잡았다.
첫 페이지.
그녀는 제목을 썼다.
『복수 계획서』
검은 펜촉이 하얀 종이 위를 지나가며,
세아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꺾이지 않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글씨 하나하나에 감정이 배어 있었다.
정윤은 딸의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세아의 어깨 너머로 공책을 들여다봤다.
'조성진. 조성진을 죽인다.'

세아의 글씨는 악필이 아니었지만,
떨리고 있었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종이가 약간 찢어질 정도였다.
정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아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하지만 세아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1. 조성진의 동선 파악'
'2. 경호원 배치 확인'
'3. 혼자 있는 순간 포착'
'4. …'
정윤은 세아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세아의 손을 통과했다.
허공만 쥐어졌다.
"안 돼! 세아야!"
정윤은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세아에게 닿지 않았다.
"이 기집애가 미쳤어, 미쳤어. 복수는 무슨. 동네 강아지 이름인 줄 아나. 미쳤어. 니가 무슨 복수야, 복수는!! 누가 그런 거 하래!!"
정윤은 있는 힘을 다해
세아 등짝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 손짓은 세아에게 닿지 않았다.
"엄마가 바라는 건 네가 행복한 거야! 웃는 거야! 친구들 만나고, 맛있는 거 먹고, 누군가 사랑하고… 그런 거라고!"
정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세아는 여전히 듣지 못했다.
"저 나쁜 놈 때문에 네 인생까지 망가지면 안 돼! 엄마가 죽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너까지 망가지는 건…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야!"
정윤은 세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세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단호했다.
흔들림 없었다.
"엄마… 나… 꼭 복수할 거야."
세아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그 새끼가 엄마를 죽였어. 법은 그 새끼를 놓아줬어. 그럼 내가 직접 해야지."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영혼이라 눈물은 없었지만,
그녀의 영혼 전체가 울고 있었다.
"안 돼… 제발 안 돼…"
하지만 세아는 노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 내가 꼭… 똑같이 돌려줄 거야."
그 목소리에 정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책상 위에서 복수 계획이 점점 채워져 갈수록,
정윤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